우리나라에서 불교와 산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유명한 사찰이나 암자가 산중에 위치한 이유는 땅의 기운을 중시한 풍수지리 사상과도 연결되는데, 특히나 산은 땅의 기운이 크게 뭉쳐 생겨난다고 믿어왔기에 명산에 사찰을 세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예전부터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여러 사찰을 다녀보았고 관련 서적도 수십권 정도 읽어서 종교가 아닌 학문적으로 접근 했었습니다. 최근 들어 본격적으로 등산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유명한 산에 오르다 보니 우리나라 산봉우리 명칭에는 새삼스레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 참 많다고 느끼게 됩니다.
특히 신라시대 고승인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께서는 전문 산악인 뺨칠 정도로 전국 각지의 명산을 다녀 여러 사찰을 창건하였을 뿐 아니라 산에서 수도를 하면서 자신의 족적과 이름을 남겼습니다. 지금처럼 등산로가 정비된 상태에서도 오르기 힘든 곳들인데 그 옛날 제대로된 장비도 하나없이 어떻게 그런 곳에 오르셨는지 참 신기할 따름이네요.
- 의상봉(義湘峯) : 거창 우두산(1,038m), 부산 금정산(640m), 광주 무등산(546m), 통영 벽방산(540m), 부안 내변산(508m), 서울 북한산(502m)
- 의상대(義湘臺) : 동두천 소요산(587m), 순천 금전산, 거제 계룡산
- 원효봉(元曉峯) : 양산 천성산(922m), 부산 금정산(687m), 서울 북한산(505m)
- 원효대(元曉臺) : 순천 금전산
이름과 관련된 명칭 말고 '보살(菩薩)'과 관련된 봉우리도 많습니다. 관음봉, 지장봉, 문수봉, 보현봉, 나한봉 등이 그것입니다. 다만 오늘의 주제는 보살과 관련된 봉우리가 아니라 '부처'의 이름에서 유래된 비로봉에 관한 내용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본격적으로 '비로봉(毘盧峯)'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비로봉도 의상봉 이상으로 그 이름이 많이 쓰이는데 조사를 해보니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더해 생각보다도 훨씬 많았습니다.
- 비로봉(毘盧峯) : 북한 금강산(1,638m), 묘향산(1,909m), 평창 오대산(1,563m), 단양 소백산(1,439m), 원주 치악산(1,288m), 대구 팔공산(1,193m), 김천 황악산(1,111m), 보은 속리산(1,032m), 가평 운악산(937m), 양산 천성산(855m), 춘천 오봉산(779m), 보령 만수산(563m), 용인 광교산(490m), 안성 도솔산(278m) 등 (높이순)
참고로 치악산 '비로봉(飛盧峯)'은 한자가 달라 '날 비(飛)' 자를 쓰는데 '도울 비(毘)' 자의 오기(誤記)라는 설이 지배적이라 포함을 시켰습니다.
또한 가평 운악산 비로봉은 가평군에서 만든 정상석 표기 명칭이고, 나란히 위치한 포천군 정상석에는 비로봉이 아닌 '동봉(東峰)'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비로봉(毘盧峯)'은 한자로 '도울 비(毘)' 자에 '밥그릇 로(盧)', 그리고 '봉우리 봉(峯)' 자가 결합되어 직역하자면 '도움이 되는 밥그릇 봉우리' 쯤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고나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죠.
'비로(毘盧)'는 산스크리트어(범어 梵語, 고대 인도어)인 '바이로차나(Vairocana)'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우리말로 하자면 '광명(光明)' 또는 '밝은 빛'이라는 뜻입니다.
아시다시피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초기 불교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불교가 중국 당나라로 전래되면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한역 漢譯)했는데, 손오공으로 잘 알려진 서유기 속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인 당나라 승려 현장법사가 이 어마어마한 일을 합니다. 이 번역(한역)과정에서 음역이 이루어집니다.
'음역(音譯)'은 외국어를 한자의 발음만 빌려 표기한 것으로, 한자 자체의 뜻풀이를 하면 안되고 외국어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원어 발음과 최대한 유사하게 표기한 것입니다.
예를들어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 직역 : 부처님 난초가 있는 서역)'라고 하거나 '이탈리아'를 '이태리(伊太利, 직역 : 저 큰 이익)'로 표기한 것이 음역(한역)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자의 뜻이 아닌 단지 음만 차용한 것이기 때문에 한자 뜻풀이가 무의미 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같은 한자표기라도 중국어 발음과 우리말(한국어) 발음에서 또 한번의 차이가 생깁니다. 한역은 중국어를 기준으로 음역한 것이므로 중국어 발음이 원어에 더 가까운 발음입니다.
'보살(菩薩)'도 산스크리트어인 'Bodhisattva'(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혜를 가진 사람)를 음역한 것이고, '부처'도 'Buddha'(깨달은 자)를 음역한 '불체(佛體)'를 거쳐 우리말로 바뀐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비로(毘盧)'는 부처님의 한 종류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줄임말 입니다. 비로자나불은 화엄종의 주불(主佛)로 어둠속에서 빛나는 빛과 같이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두루 비추는 부처님입니다.
'비로봉'은 이와같이 한자 뜻인 도움이 되는 밥그릇 봉우리가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산 정상(혹은 특정 봉우리)과 같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있는 중생들에게 널리 설파하는 봉우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인 '진리의 부처님'이라 불리는데 손 모양(수인 手印)으로 쉽게 구분이 됩니다. '지권인(智拳印)'이라 불리우는 이 손 모양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손 모양입니다. 오른손은 부처가 사는 세계를, 왼손은 인간 세계를 나타냅니다. 지권인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중생을 구제하고 번뇌를 없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사찰 내 건물(전각) 명칭으로 내부에 모셔진 부처님을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전각에 대웅전(大雄殿)이라 표기되어 있으면 우리가 잘 아는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비로전(毘盧殿), 화엄전(華嚴殿), 대적광전(大寂光殿), 적광전(寂光殿) 등의 전각이 있으면 그곳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말 평창 오대산에 다녀왔습니다. 상원사에서 출발하여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거쳐 비로봉 정상까지 올랐다가 원점회귀하는 코스였는데, 적멸보궁은 '번뇌가 사라진 보배로운 궁전'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곳에만 붙이는 특별한 명칭입니다. 우리나라에 딱 다섯 곳(통도사, 법흥사, 정암사, 봉정암, 상원사) 밖에 안되는 성지 중의 성지로 적멸보궁이 모셔진 오대산 주봉에 비로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지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만의 등산경로(GPX)를 만들어 봅시다 (0) | 2024.11.01 |
---|---|
나는 왜 산을 오르는가 (0) | 2024.04.12 |
등산 어플과 스마트워치의 측정 정확도에 관한 고찰2 (0) | 2024.03.24 |
등산 어플과 스마트워치의 측정 정확도에 관한 고찰1 (0) | 2024.03.24 |
T-Rex2 등산용 내비게이션 활용 (0) | 2024.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