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시 갈림길에 설치된 이정표는 목적지(대부분 정상)의 방향뿐 아니라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고마운 존재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정표에 표기된 잔여거리가 평소 다니는 길 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지지 않았나요? 등산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저역시 산에 다닐때마다 그 이유가 늘 궁금했는데 이번에 도봉산 등산을 하면서 평소 갖고 있던 의문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도봉산이라는 하나의 표본만으로 확신하기엔 성급한 면이 없지 않지만 제가 세운 가설과 딱 맞아떨어지는 결과를 얻었기에 이에 대한 고찰글을 써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론도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2023년 10월 29일 오전 8시 39분 도봉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여 천축사 ~ 마당바위 ~ 신선대 정상까지 올라 원점으로 회귀하는 코스로 산행을 했습니다. 전체 산행시간은 3시간 5분이었고, 총 이동거리는 6.01km 였습니다. 미밴드7을 착용하고 산행한 경로를 Zepp Life 앱에서 캡쳐하였습니다.
첫번째 목적지인 천축사에 도착하여 발견한 이정표 입니다. 출발지인 도봉탐방지원센터까지의 거리가 사진과 같이 2.1km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즉, 출발지로부터 2.1km 걸어온 셈이죠.
같은 자리에서 미밴드7로 확인한 모습입니다. 출발지인 도봉탐방지원센터로부터 42분 동안 2.07km 거리만큼 왔다고 표시되어 있네요. 30m 정도의 오차라고 한다면 사실상 같은 거리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미밴드는 자체 GPS가 없고 연결된 휴대폰의 GPS 좌표를 통해 거리를 계산하므로 이정표에 표기된 거리는 GPS로 측정한 거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천축사 이후에도 계속 측정을 진행하고 싶었습니다만 중간에 다른 경로를 들어가기도 했고, 저의 최종 목적지인 신선대는 이정표에 표기되지 않은채 갈 수 없는 자운봉만 표기되어 있어 대조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두 지점간의 거리가 확실하게 2.1km라는 사실은 검증이 된 셈이죠.
그렇다면 저는 도봉탐방센터로부터 진짜로 2.1km만 걸어서 천축사에 도착한 것일까요? 체감상으로는 훨씬 더 먼 길을 걸어온 것 같은데 말이죠. 제가 일차적으로 세운 가설은 이렇습니다.
"이정표에 표기된 거리는 실제 이동거리가 아닌 GPS로 계산된 거리이다."
그렇다면 실제 이동거리와 GPS로 계산된 거리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의문이 생길겁니다. 둘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거구요.
잠시 옆길로 새면 저는 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습니다. 토목공학의 여러 분야 중 측량학 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측량장비를 이용해 사람이 직접 거리와 높이를 측정했지만 이제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공위성을 통해 전세계 어느곳이든 간단하게, 심지어 휴대폰 만으로도 정확한 위치와 해발 고도를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죠.
평소 네이버나 카카오맵 등에서 지도를 볼때 위성사진을 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지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우주의 궤도에서 인공위성이 고해상도의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다만 이 위성사진은 3차원이 아닌 2차원 평면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위성지도는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찍은 사진을 모두 같은 높이에서 촬영한 것처럼, 그리고 촬영된 해당 지점의 수직한 곳에서 찍은 것처럼 보정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 지도의 정확성과 축척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정사투영 변환'을 한다고 하는데 몰라도 관계 없습니다.
그림과 같이 해발 500m의 산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인공위성에서 산 정상(해발 500m)과 산 아래(해발 0m)를 찍으면 두 점의 경도와 위도는 모두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해당 지점의 수직한 높이에서 촬영한 것으로 정사투영 변환을 하기 때문입니다. 정상과 산아래의 경위도는 동일하되 단지 해발고도만 차이가 나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인터넷의 지도 서비스는 모두 이러한 원리로 만들어진 것이라 높이(해발고도)의 차이 없이 경위도의 구분만 갖는 2차원 평면 형태로 보여집니다. 거리의 계산은 모두 높이의 차이는 무시한채 경위도 좌표만을 가지고 2차원으로 구하게 되는 것이죠.
이번에는 그림과 같은 4개의 경로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검은색의 AE 경로는 수평한 지면(해발 0m)이라 하고 붉은색 BG 경로는 오르막 경로, 녹색 CF 경로는 내리막 경로, 그리고 보라색 DH 경로는 거의 수평하지만 살짝 내리막 경로입니다. 각각의 경로는 그 길이(거리)가 모두 다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AE 경로가 가장 짧고 경사가 커질수록 경로는 길어집니다.
그런데 GPS 측량에서는 출발점인 A, B, C, D와 도착점인 E, F, G, H점의 경위도가 각각 동일하므로(높이차만 존재) 위성지도상에서는 AE 경로, BG 경로, CF 경로, 그리고 DH 경로가 모두 같은 거리로 계산됩니다.
즉, 실제 이동거리와 위성지도상에서의 측정 거리(이하 "GPS 거리"라 한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경사가 없는 수평일 경우 이동거리와 GPS 거리가 동일하지만 두 지점의 높이차가 커질수록(경사가 커질수록) GPS 거리보다 이동거리가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산은 평지와 달리 당연히 고저차가 존재하므로 GPS 거리로 표기된 이정표 숫자보다 이동거리가 더 크기 때문에 체감거리가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더 많은 거리를 걷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이동거리는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까요? 고민끝에 마당바위에 있는 탐방로 안내 표지판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경사가 본격적으로 급해서 산행이 힘들어지는 구간인 마당바위~신선대 까지의 경로에서 이정표상 거리가 아닌 실제 이동거리를 계산해보겠습니다.
마당바위에 설치된 탐방로 안내 표지판 입니다. 두개의 코스(주봉 코스, 신선대 코스)에 대한 거리와 경사도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경사도는 % 단위로 표기되어 있는데, 경사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각도(˚)를 떠올리겠지만 여기서 표기된 경사도는 각도가 아닌 구배 즉, 탄젠트(tan) 값을 의미합니다.
이 그림을 보면 경사와 경사도의 차이를 간단하게 이해가 되실겁니다. (이해가 안되신다면 그냥 패스해주세요. ㅠㅠ) 아무튼 이해했다치고 다시 탐방로 안내 표지판의 마당바위에서 신선대 코스(맨 아래)를 보면 일단 마당바위 ~ 구조대삼거리 까지는 거리가 0.3km, 경사도가 64.7% 입니다. 그리고 구조대삼거리 ~ 신선대 까지는 거리가 0.5km, 경사도가 52.0% 입니다.(작게 나와 원본이미지로 확대해 보시면 확인 가능할 것입니다. 이미지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습니다.)
정리하자면 마당바위에서 신선대 까지의 GPS 거리는 탐방로 안내 표지판에 표기된 대로 0.8km(800m)입니다. 두 지점 사이에 구조대삼거리가 있고 이곳을 기준으로 경사도가 64.7%에서 52.0%로 변화합니다. 마당바위나 구조대삼거리의 해발고도는 알지 못하지만 두 지점간 GPS 거리(이정표 거리)와 경사도를 알기 때문에 실제 이동거리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동경로가 일직선이 아니고 구불구불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단순히 삼각함수를 이용해서 정확한 이동거리를 구할 수는 없고 직선이라는 가정하에 말그대로 개략적인 추정치를 계산하는 방식이므로 오차가 발생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값인 GPS 거리(300m)와 경사도(64.7%)를 이용해 마당바위에서 구조대삼거리 까지의 경사(각도, θ)를 구합니다. 그리고나서 구해진 경사(θ)로부터 실제 이동거리(AB)를 계산합니다. GPS 거리(300m)와 달리 실제 이동거리는 약 357m로 GPS 거리보다 57m가 증가하였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구조대삼거리로부터 신선대까지의 실제 이동거리를 구합니다. 역시 알고 있는 값인 GPS 거리(500m)와 경사도(52.0%)를 이용해 구조대삼거리에서 신선대 까지의 경사(각도, θ)를 구합니다. 그리고나서 구해진 경사(θ)로부터 실제 이동거리(AB)를 계산합니다. GPS 거리(500m)와 달리 실제 이동거리는 약 564m로 GPS 거리보다 64m가 증가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마당바위로부터 신선대까지는 이정표에 표기된 것은 800m 이지만 실제 등산객이 걸어가야 하는 거리는 357m + 564m = 921m로 이정표 거리(GPS 거리) 대비 121m 많이 걸어야 합니다. 체감적으로 숫자보다 많이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약 15% 정도 더 많은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탐방로 안내 표지판에 표기된 경사도는 단지 숫자만 표기되어 있을뿐 어떻게 계산된 것인지 근거를 찾을 수 없기에 그에 대한 오차는 별개로 하겠습니다.
등산을 할 때 정상이 가까울수록 힘이 들기 때문에 잔여거리가 더 멀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경사가 더 심해지기 때문에 이동거리가 훨씬 길다라는 사실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당연히 산의 해발고도가 높을 수록, 그리고 이동경로가 길 수록 그 차이는 비례하여 커집니다.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왜 산을 오르는가 (0) | 2024.04.12 |
---|---|
등산 어플과 스마트워치의 측정 정확도에 관한 고찰2 (0) | 2024.03.24 |
등산 어플과 스마트워치의 측정 정확도에 관한 고찰1 (0) | 2024.03.24 |
T-Rex2 등산용 내비게이션 활용 (0) | 2024.02.18 |
등산앱에서 GPS 거리는 어떻게 계산할까? (0) | 2024.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