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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

모두가 말리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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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대한민국 부모라면, 아니 99%의 대한민국 부모라면 자식이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자식이 공부를 안해 걱정인 부모가 대다수 일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공부에 대한 별다른 압박을 받지 않고 자랐고 그로 인해 오히려 상대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자식에게도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지켜보는 입장에서 속이 터지는 상황이 발생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확신하며 공부를 강요할 생각이 없다.

 

각설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기술사 시험에 합격하고 한동안 그 기쁨에 취해 지내다가 어느 순간 뭔가 공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평소 여유시간에는 공부를 하곤 했던 생활을 직장에 다니면서도 10년 이상 지속했는데 더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니 뭔가 사람이 무기력하고 멍해지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집사람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낼거면 차라리(?) 다른 공부를 하라고까지 했다. 처음에는 다른 종목의 기술사에 도전해 볼까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기술사 수험생활의 지난함을 누구보다 오랫동안 경험한 사람으로 다시 기약없는 수험자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생애 전환기를 지난 후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신체와 정신(기억력)의 둔화로 인해 더이상의 기술사 공부는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무렵 우연치 않게 다니는 직장에서 수도권 소재의 대학원 학비를 절반정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합격까지 기약없는 기술사 시험에 비하면 2년이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대학원은 분명 매력이 있었다. 주변에 박사학위를 가진 분들의 강추까지 더해져 나중에 어찌될지 모르니 일단 석사는 해놓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집사람에게 의논하니 무슨 공부를 또 하냐며 펄쩍 뛰었다. 언제는 무기력하게 지내지말고 공부를 하라더니 막상 공부를 한다고 하니 그건 그냥 무기력하게 지내지 말라고 한소리지 진짜 공부를 다시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고 한발 물러났다. 아빠의 고민을 알게된 중학생 자녀 역시 공부는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고민끝에 회사에서 가까운 거리의 모 대학교 토목공학 석사과정의 야간대학원 등록을 했다. 퇴근 후 바로 갈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 외에도 대학원 자체 장학금 제도와 회사의 학비 보조 프로그램에 힘입어 거의 공짜로 다닐 수 있다는 경제적 장점이 있었다.

 

막상 대학원 과정이 시작되니 일주일에 두번만 수업을 듣는 것임에도 그게 의외로 부담될 때가 있었다. 코로나 시기와 겹쳐 학교에서 수업은 받지도 못하고 원격으로 수업을 하는 것을 1년 정도 했고, 수업 출석과 시험의 압박으로 인해 내가 무슨 영화를 보려고 이걸 하고 있나라는 후회도 적지않게 했다.

 

가족모임에서 내가 대학원을 다니는 것을 알게된 부모님의 반응 또한 처자식과 다를바 없었다. 이젠 인생을 좀 편하게 살지 뭐하러 공부하냐는 엄마와, 즐기며 살라는 아버지의 말씀까지 가족 누구하나 내 공부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다. 말 그대로 모두가 반대하는 공부. 세상에 자식이 공부하겠다는데 이렇게 반대하는 부모가 어딨냐고 웃으며 되받아 쳤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내가 계속 공부하는게 잘못된 건가 라는 의문도 들었다.

 

2년여의 우여곡절 끝에 얼마전 석사학위를 받았다. 난생 처음 논문심사라는 것도 받아보고 학위기 이외에 대학원장 명의의 성적우수 표창장까지도 받았다. 한살이라도 젊을 때 박사학위를 해야한다는 소수의 박사출신 지인들 이외에는 더이상 나에게 공부를 추천하는 사람도 없다. 집사람에게는 절대 박사과정은 밟지 않는다 다짐을 했고 앞으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을듯 싶다.

 

어찌되었든 모두가 말리는 공부는 이제 끝이 났다. 다만 내년에 국가기술자격이 아닌 전문자격시험 딱 하나만 더 도전해볼 심산이다. 진짜 그게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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