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살구 2019. 8. 17.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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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합격 발표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 3월초, 허리디스크 초기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받았다. 한동안 극심한 통증에 잠못이루는 밤이 계속되었고 몇군데 병원을 옮기며 물리치료와 주사치료를 받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하늘은 왜 나에게 기쁨과 시련을 동시에 주는 것인가 한탄했고 한동안 우울한 날들이 이어졌다.

 

근본적인 완치는 불가하지만 꾸준한 운동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하고 4월초부터 퇴근후 저녁을 먹고 평소 공부하던 시간에 동네 공원을 걷기 시작했고 다행히 통증도 서서히 완화되어 갔다. 합격하지 못했더라면 어쩔뻔 했나 하는 아찔함과 함께 이젠 나도 건강을 신경쓸 나이가 됐구나 하는 서러움도 찾아드는 요즘이다.

 

매일은 아니어도 일주일에 서너번씩 걷기운동을 하고 있는데 단기간에 차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효과는 있다고 느낀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아까워서라도 앞으로는 건강을 챙겨가며 살아야 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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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합격 이후 많은 교류가 생겨났다. 술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지만 일부러 찾아서 마시지 않는 편인데 합격의 소문이 퍼져나갔고 같은 직장 동료 선후배들로 부터 축하의 인사를 많이 받았다.

 

어쩌다보니 지방 일간지에 기사까지 실리게 되면서 몰랐던 사람들까지 그 소식을 접하게 되어 술자리도 많이 생겨났는데 작년에 승진했을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기분좋게 한턱을 내다보니 거의 2백만원 이상 쏘고 다닌 것 같다. ㅎㅎ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지만 내가 한 이야기는 30%, 나머지 70%는 기자의 상상력과 과장이 보태져 정말 오글거리는 가짜뉴스급(?) 기사가 나와 차마 링크는 못걸겠다.)

 

카페에서 알게된, 같은 회차에 합격한 건축구조기술사분도 만났고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공부한 이야기, 수험생활 과정, 면접 등등 비슷한 레퍼토리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놨지만 전혀 질리지 않았다.

 

다른 직장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는 기술사 수당이 월 5만원인데 기존에 받던 기사 수당인 월 3만원 대비 실질임금은 월 2만원 오르는 수준이라 그동안 수험생활하며 지불한 수험료에 교재비, 그리고 이번에 거하게 쏘고다닌 합격턱은 앞으로 퇴직까지 대략 20년으로 계산하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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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고,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확실히 종목은 달라도 다른 기술사를 취득한 분들이나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본 분들은 정말 고생했다고 격려와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친하지 않지만 알고 지내는 직장 선배 중 한분(토목시공기술사)은 '우리 조직의 영광'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큰 일'을 했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공부를 해본 적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분들은 그냥 땄나부다 하는 정도랄까? 그 온도차가 정말 극과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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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초 인사발령으로 부서 내에서 팀을 옮겼다. 자리도 바뀌고 업무도 바뀌어 명함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름 밑에 '토목구조기술사' 일곱글자를 새겨넣었다. 새로운 업무로 인해 만나게 되는 용역사, 시공사, 감리단 등등 인사를 나누며 명함을 교환할 때마다 다들 깜짝 놀라며 그 자격증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한다. 똑같은 말이라도 일곱글자가 주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내 발언과 지위에 권위가 생겨버렸다. 

 

사무실에 여러 자재나 회사 홍보를 위해 브로셔를 들고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얼마전에는 교량 면진받침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업체의 영업사원이 찾아왔었다. 보통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터인데 그날따라 별다른 일이 없기도 했고 면진받침에 호기심이 생겨 한참 설명을 들어줬다. 설명후 인사를 한 뒤 영업사원이 조심스럽게 내 명함을 받아갈 수 있냐고 묻길래 한장을 줬다.

 

일주일쯤 지났을라나. 그 회사 대표이사가 나를 찾아왔다. 영업사원에게 건넨 명함을 보고 나를 꼭 한번 뵙고 싶다며 찾아왔다고 했다. 지방직에서는 보기 힘든 그 자격 때문이었을게다. 나보다 한 서너살쯤 위로 보이는 젊은 대표이사가 건넨 명함에는 '공학박사'라고 씌여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었지만 면진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비교적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야기를 나눴다. 그 분이 돌아가고 난 뒤에 자격증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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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지인들에게 다른 종목의 기술사 공부를 하나 더 하라는 권유를 자주 받게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같은 권유지만 기술사라는 공통점 이외에 추천하는 종목이 모두 다르다. 현재까지 추천받은 종목은 토목시공, 건축구조, 토질및기초, 철도, 도시계획, 도로및공항 등이다. 심지어 어떤 분은 대학원 과정으로 석사와 박사를 밟으라고 권유한다.

 

추천받은 것들을 모두다 할 수 없는 노릇이고 허리까지 안좋은 상태라 뭔가를 시작하기가 선뜻 겁이 나는게 사실이다. 또 합격 이후 공부에서 아예 손을 놓은터라 다시 시작하자니 그 지난한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정말 큰 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쉽사리 결정하기가 어려운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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