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

집단의 광기일까 무지의 소산일까

개살구 2018. 2. 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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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18.)



지금은 파워포인트가 주류를 이루겠지만 내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 전공수업을 받을때는 전통적인 판서 수업 아니면 OHP 필름과 영사기를 이용한 수업이 반반이어서 강의실 칠판 상단에는 하얀색의 수동 빔프로젝터 스크린이 매달려 있었다.


우리과 전공과목 교수님중 좀 엄격하고 고지식한 분이 계셨는데 어느날 강의실에 들어오셨다가 하얀색 빔프로젝터 스크린에 누군가 분홍색 분필로 조그맣게 <철수♡영희> 이런 식으로 써놓은 것을 발견하시곤 흥분하면서 수업대신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대부분의 교수님이 그러하겠지만 그 교수님 역시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신탓에 미국의 예를 들며 이런 짓은 미국에서는 'Vandalism'으로 불리우는 아주 무식하고 혐오스러운 행동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만 해도 반달리즘이 뭔지 알지도 못했지만 어떤 뉘앙스 인지는 어렵지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지성의 요람이요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상아탑인 대학 캠퍼스 화장실이나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유원지 공중변소나 그 내부의 질낮고 낯뜨거운 낙서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교수님이 흥분하신 초등학교 교실에서나 있을법한 유치한 낙서 또한 당시의 내 생각으론 그렇게 흥분할 '깜'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는데 휴양지나 자연경관이 멋진 곳보다는 유적지나 사적지가 있는 곳을 우선 대상으로 고려하는 편이다.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오래된 사찰이나 서원, 그리고 문화재 관람을 좋아하고...


지난주 남들보다 조금 이른 여름휴가로 경주를 다녀왔는데 중학교 2학년때 수학여행을 간것까지 포함해서 이번이 세번째 방문이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워낙 볼거리가 많아 한번 방문했던 곳은 잘 안가고 새로운 곳을 택하는데 경주라는 곳은 설명이 필요없는 곳이기에 한번의 방문으로 그많은 유적들을 다 둘러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서 여러번의 방문으로 이어졌다.


3박4일의 일정으로 마지막날에는 그간의 경주여행에서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을 둘러보았다. 양동마을은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심이 높아진 곳이고, 옥산서원은 국보나 보물급의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아니지만 양동마을 출신인 회재 이언적을 모신 곳이고 양동마을과 지척의 거리에 있어 마지막 관람지로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옥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주변 풍광이 멋진 곳이었다. 그동안 여러곳의 서원을 다녀봤지만 다들 하나같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어 이렇게 멋진 곳에서 그 옛날 선비들은 어떻게 풍류가 아닌 글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던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경주라는 곳이 워낙 볼거리가 많아 옥산서원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그런데 옥산서원에 들어서고 그중 한 건물의 벽면을 보고 정말 경악을 금할수 없었다.


 



심산유곡의 서원에 옛 선비들의 자취와 정신을 느껴보려는 좋은 취지에서 방문한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저 추악한 낙서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건 관리소홀의 문제보다 저렇게 만들어 놓은 인간들의 됨됨이가 가장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재미로 혹은 장난으로 시작했겠지만 한두명이 아닌 집단이 저런식의 광기를 보인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학교때 스크린이나 화장실 낙서와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의미의 '반달리즘'이요 범죄행위다. 아들이 아직 어려 설명은 못해줬지만 초등학생만 되었어도 저건 정말 나쁜짓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기분좋은 여행의 마무리로 추악한 인간의 단면을 보고나니 집에 오는 내내 그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지켜주지 못하면서 자신의 흔적이, 사랑이 지켜지고 기억되길 바라며 파내려간 추악한 손길의 주인공들의 인생과 사랑은 자신들의 바람대로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하게 지켜지고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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